20세기에 들어서면 영국은 서양 미술 흐름과 무관한 듯 보인다. 왜 그럴까. 보수적인 국민 정서와 섬나라라는 지리적 조건 외에 이야기를 좋아하는 민족 취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서양 현대 미술은 이야기를 빼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영국은 서양 미술의 중심에 서게 됐다. 사람들이 미술에서 이야기를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미술은 언제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시대 서양 미술의 최고 작가로 불리는 루치안 프로이트, 프랜시스 베이컨은 모두 영국 구상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들의 그림에는 언제나 인간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것이 영국 미술의 힘이다. 폴 내시(1889~1946) 역시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영국 작가다.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그는 오늘날 영국이 서양 미술을 이끄는 데 텃밭 구실을 했다. 내시는 매우 독창적인 풍경화가다. 영국 풍경화 전통을 발판 삼아 새로운 의미의 풍경화를 개척했다. 그는 1·2차 세계대전에 전쟁기록 화가로 참전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독자적 풍경 세계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현장에서 모티프를 얻어 초현실적 공허감이 깃든 독특한 감수성을 만들어냈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무거운 정적에 휩싸인 초토화된 벌판이다. 유혈이 낭자한 주검 없이도 전쟁의 끔찍함을 부각했다. 이 작품은 만년에 그린 대표작이다. 영국 옥스퍼드 인근 들판에 추락한 독일군 비행기의 잔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낭만주의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극적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굉음과 화염에 휩싸여 들판에 내리박혔을 비행기, 폭발과 함께 산산이 부서지고 흔적 없이 타버렸을 군인들, 그리고 하늘을 뒤덮었을 검은 연기. 시간이 흐르고 벌판엔 교교히 달빛이 내린다. 검붉은 언덕 아래 부서진 비행기 잔해가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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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공=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