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인 라이브즈(Nine Lives, 2005) - 감독 로드리고 가르시아 **

- 우리 봐. 걷고 말하고 연인 같잖아, 제길. 너랑 만난 지 5분인데, 내 인생이 허구로 느껴져.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라고 정현종 시인은 말했지요. 임산부인 여자가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문득 낯익은 남자를 발견합니다. 와르르 무너진 마음의 벽 너머로 아득히 멀어진 얼굴. 그들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각자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고 맙니다. 느닷없이 불쑥 치밀어 오르는 어떤 격정 때문에 도무지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여자를 잊지 않았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반문하고 남자는 ‘우리’라고 일컬으며 단단한 친밀감을 형성합니다. 한때 너무도 진지했던 남자가 한갓 바람처럼 스며들어 폭풍처럼 덮칩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단 5분만에 허물어지고, 겨우 몇 분 사이에 오랫동안 쌓아온 안온한 일상에 균열이 생깁니다.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그냥 꽃봉오리인 채로 더 어여쁜 꽃도 있어요. 활짝 펴야 비로소 제 향기를 내뿜는 꽃도 있지요. 여자는 남자가 보이지 않자 차마 뱉지 못한 울음을 애써 삼키며 그를 찾으러 허둥지둥 마트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돌풍 속으로 흩어졌을지, 한 방향의 바람 속으로 스며들었을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그들이 어느 날처럼 또 어려운 순간에 봉착했다는 것, 그리고 예기치 못한 그 순간에 삶은 다시 흐른다는 것.

 
‘나인 라이브즈’는 제목에서처럼 여성들의 아홉 가지 다단한 삶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직조한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제58회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2005)에서 출연 여배우 14명 전원이 여우주연상을 공동수상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권선혜 book@j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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