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종(Grain In Ear, 2005) - 감독 장률 **

-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박노해)

[JTN뉴스 권선혜 기자] 중국 변방. 공간들은 텅텅 비어 있고 사람들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척에서 짐기차 소리가 요란하고 저 멀리 공장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무덕무덕 피어납니다. 이곳에서 순희는 삼륜자전거를 타고 김치를 팔러 갑니다. 순희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는 조선족 여인이지요. 저녁은 소리 없이 몰려오고, 음예(陰翳)의 시간은 시작됩니다.

소만과 하지 사이 망종(芒種)이 있습니다. 중국 농민에게 망종은 가장 바쁘고 힘든 절기라고 하지요. 보리를 베어내고 볍씨를 뿌리는 망종을 놓치면, 이삭이 지나치게 무거워져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망종의 한가운데 순희가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고독의 무게를 견디느라 축 쳐진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잡아줍니다.

같은 조선족인 그는 유부남이었지요. 그런데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는 순희를 매춘부로 몰고, 경찰에 연행된 그녀에게 경찰은 풀어주는 대신 모종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더구나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들은, 보리처럼 꼿꼿한 그녀의 아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희망은 자꾸만 뒤꽁무니를 보이며 도망갑니다.

순희는 텅 빈 보리밭을 향해 뒷모습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중심을 다잡으며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어디가 끝인지 모를 생의 비의(悲意)를 통과하는 무거운 발걸음입니다. 아닙니다. 낟알 같은 희망마저 잃은 한 여자의 날카로운 체념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락 같은 절망을 베어내고 더는 무너지지 않으려는 굳은 결의입니다. 발과 발이 부딪쳐 넘어진다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삶은 시작되니까요.

재중동포인 장률 감독은 이 영화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상을 수상한 데 이어 시애틀국제영화제에서 신인감독심사위원특별상을 거머쥡니다.

권선혜 book@j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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