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큰 울림으로 기억될 한 소녀의 이야기

[JTN뉴스 임귀연 객원기자] 영화 ‘한공주’는 과거 끔찍한 일을 겪었던 한 소녀의 현재 시점의 이야기다.

‘한공주’라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초반부에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암시들을 통해 그녀가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학교에서는 조용히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그녀를 인천에 있는 다른 학교로 급히 전학 시킨다. 제대로 된 항변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낯선 곳으로 가서 새로운 일상에 힘겹게 적응해나가는 그녀. 술주정뱅이 아빠도, 재혼한 엄마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혼자서 담담하게 새로운 일상에 차차 적응해 나간다.

예전 학교 담임선생님의 어머니의 집에 얹혀 사는 동안, 그 집주인 아주머니와 인간적인 정을 나누기도 하고, 기꺼이 자진해서 슈퍼마켓 일을 돕거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틈틈이 수영을 배우기도 하며 착실히 생활하는 그녀이다.

또한 새로운 학교에서 음악은 그녀의 남모를 아픔을 위로해 주며, 유일하게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게 해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 우연히 그녀의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며 곁을 지켜주는 ‘은희’라는 좋은 친구가 나타난 것을 계기로 공주에게도 새로운 친구들이 생긴다. 게다가 ‘공주’가 만든 자작곡 연주 영상이 오디션을 통과하기도 하며 그녀는 친구들과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만끽한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무책임한 아버지로 인해 언론에 그녀가 과거에 당했던 사건이 기사화 되어 버리고, 학교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가해자의 가족들 때문에 그녀는 어렵게 정 붙였던 곳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위태위태하게 지속되던 평화로운 삶이 가해자의 부모들로 인해 발칵 뒤집어진 뒤, 그녀는 결국 속으로만 삭히며 참고 참았던 울분을 쏟아내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영화는 십 수년 전 한 소녀를 두고 실제 자행되었던 또래 남학생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실제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다만 그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한공주’라는 어린 소녀의 관점에서 그 사건 이후의 개인적 삶을 차분히 담아 내는데 주력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 ’도가니’가 그랬던 것처럼 관객들에게 특정한 공분을 조장하거나 굳이 지나간 사건의 정의가 뭔지 구태여 따져 묻지는 않는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단지 그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겪었을 아픔과 상처, 좌절감을 관객들에게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에 있다.

주인공 ‘한공주’ 역할을 맡은 배우 천우희의 실제 나이는 20대 후반이지만, 실제 열일곱 여고생인 줄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실감나고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그녀가 열연한 ‘한공주’는 유난히 표정도 없고 말수도 적은 편이다. ‘공주’는 이미 현실을 알고 체념해버린 듯 때로는 소극적으로 때로는 눈치 빠르게 처신하며 지극히 담담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따금 ‘공주’가 당한 끔찍한 사건이 그녀의 회상씬을 통해 조금씩 드러날 때, 관객들은 마치 퍼즐 맞추듯 서서히 진실에 근접하게 된다. 그리고 끝부분에서 밝혀지는 사건의 실체는 그간 의연해 보이던 ‘공주’의 모습과 대비되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수진 감독의 섬세하고 세심한 연출력은 두 시간이라는 상영시간 동안 때로는 끊임없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때로는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관객들이 지루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는다. 똑같은 소재의 이야기도 누가 어떻게 이야기하나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지는 법. 그는 청소년 간의 성폭행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룸에 있어서 노출이나 폭력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보다는 피해자 여학생의 입장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더 초점을 두고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영화 속에 풍성한 은유를 통해 뻔하지 않게 관객들이 스스로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게 한다.

‘공주’는 못하는 수영을 정말 악착같이 배운다.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수영을 배우는 이유는 딱하나 살기 위해서다. 너무 현실이 무거워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그녀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수영을 배운다. 그녀는 소원이 뭐냐는 친구의 물음에 헤엄쳐서 25m 수영레인 끝까지 가는 것이라고 소박하게 대답한다.

설령 그 목표를 이루더라도 필연적으로 앞을 가로 막는 벽에 부딪치게 될 텐데, 이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녀를 따라다니는 현실의 차가운 ‘벽’을 암시하고 있다.

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듯한 부조리한 현실은 관객들에게 깊은 한숨이 나오게 만들지만,이 때에 현실적인 터치로 묘사되는 그녀의 주변인들 모습은 거울처럼 우리들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사태를 쉬쉬하며 은폐하려 하는 학교 선생님이나 자기 자식들 귀한 줄만 아는 가해학생들 부모들, 혼자 떠나는 공주를 가만히 지켜보는 어른들이 그 대상이다.

특히 함께 사건에 연루됐던 ‘화옥’을 외면했던 ‘공주’처럼, 새로운 단짝친구 ‘은희’ 역시도 가장 필요한 순간 ‘공주’의 전화를 받지 않고 외면하고 만다. 결국 강물에 투신한 ‘공주’는 죽었는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을지 감독은 열린 결말로 남겨 놓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이중적인 ‘은희’의 모습은 타인의 아픔에 진심 어린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지 못했던 우리들 각자에게 감독이 던지는 질문처럼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끝난 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안타까움과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울림, 그리고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 ‘한공주’였다.

JTN 임귀연 문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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