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갤러리 와’에는 가을이 먼저 와있었다.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국화향이 따사롭게 코를 찌르며 '강산별곡'이라는 정갈한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강산별곡'… 처량하고도 정다운 전시제목은 여러 천년의 사랑편지처럼 알 듯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양종훈의 강산별곡』은 “갤러리와 개관 3주년 기념 초대전”에 걸맞게 호주 원주민들, 동티모르, 히말라야 가는 길, 국내 산간오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강산별곡, 에이즈 등 5개 전시실에서 5개의 주제로 펼쳐졌으며, 양종훈 상명대 교수의 지난 20여 년간의 활동을 보여주는 작가의 중간결산 같은 대규모 사진전이었다.

오후가 저물 즈음 야외무대가 개막되면서 사회 각계 인사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열띤 축사와 축하무대가 이어졌고, 공중에 떠오른 열기는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일제히 내려앉으며 차분함을 되찾길 반복했다.

어쩌지 못하는 고통의 이름

전시회 안쪽으로 들어가자 구석진 삶의 피폐한 정경이 펼쳐졌다.

힘들고 고통스러워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할 때, 가없는 벌판에 나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듯할 때, 지는 해를 등에 지고 걸어가던 어린 낙타 한 마리처럼 넘치는 고독에 그만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작가는 그러한 고통의 밤이 찾아오면 심안의 셔터를 열어놓는다. 새벽 내내 건져올린 이미지 한 컷은 내면속에서 번식해나가며 무한한 감동과 치유의 기능을 한다. 고통에 찬 어떤 순간조차 역동적인 빛을 간직한 앵글은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응의 법칙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하얀 입김이 서리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라고 말한다. 닿을 수 없는 한계점을 공유한 채 결코 호락호락함을 용납하지 않는 삶의 지점을 막힘없이 항해하라고 말한다.

턱까지 차오르는 고통 끝에 마시는 물이 더 단 법이다. 전시회장을 한가로이 거닐며 느꼈던 것들은 단순히 사진속에 녹아 있는 그들의 삶이 아니었다. 벽이 가로막으면 그 끝을 딛고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재생의 힘이고 히말라야 정상을 향한 희망의 빛이었다.

약하고 연한 것들의 그늘진 자리에서

신은 우리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고통만 허락하신다고 한다. 굳은살처럼 박혀버린 고통속에서 작은 손길에도 금세 화르르 녹아내리는 그들의 그늘진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환부조차 보이지 않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소외가 습관이 된 사람들의 삶은 아프고 쓰리다.

작가는 비탈진 자리마다 놓여있는 것들을 향해 비탈진 자세인 채로 셔터를 누른다. 허나 어두운 물리적 앵글에서 정작 작가가 뽑아내는 것은 한 줄기 빛이었다. 빛을 수반한 파닥파닥 뛰는 ‘생명’,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작가는 땀과 눈물로 빚은 곱디고운 열 알의 삶의 편린들을 여과없이 표출하며,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은 아닐는지 반문한다. 그 뼈아픈 성찰은 뾰족한 화살촉이 되어 심장에 그대로 와 박힌다. 그래, 통렬한 아픔이 지난 뒤 여기저기 구멍난 삶에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은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삶의 빛을 간직한다. 노인의 닳고 닳은 손등은 한낮에 반짝이는 물결속처럼 하염없이 따사롭다. 하여, 끝간 데 없이 주름진 그들의 삶 앞에서 내 사소한 일상은 충분히 위무되고도 남으리라. 어디론가 숨고 가리고만 싶은 그들의 삶을 파헤쳐 손을 건네보자. 그 토닥이는 위로는 곧 나에게로 향한다.

삶은 고통이기에 아름답다

흔들린다는 것은 마음의 지진이다. 통곡이 몸으로 흘러넘쳐 일으키는 위태로움인 것이다. 흔들림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지만 고통은 살아있음의 증명이 되기도 한다.

모든 흔들림을 산들바람처럼 흘려보내며 저절로 아물어가는 치유의 손짓을 보라. 흔들리는 세상을 향해 흔드는 저 빛바랜 손들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진실이 아닐까.

한쪽 문이 닫히면 한쪽 문이 열리듯 영원한 고통은 없다. 작품 속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여전히 웃고 사랑하고 부비면서 그들 몫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다. 그저 지금 한번 크게 웃을 수 있는 것, 그냥 좋은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의 목적인 것이다.

'양종훈'이라는 작가는 욱신거리는 한 움큼의 사랑을 탄생시키기 위해 오늘도 우뚝한 한 그루 나무처럼 서있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가지들의 울음소리 솎아내며 아릿아릿한 아픔을 안으로 안으로 감싸안는다.
가기 힘든 길이지만 끝끝내 가보고 싶은 삶의 여정 위로 작가의 온화한 미소가 가을꽃처럼 번진다.

JTN 권선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