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이 들면 곳간 열어 굶는 이웃 없게 하고
부자가 벼슬까지 높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넉넉하고 지체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바르게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넓고 큰 고택. 무려 1700년 쯤 건립된 이 고택은 경주 최고의 부자 ‘최부자가 살았던 집(최부잣집)’이다.수많은 손님들이 머물렀던 사랑채, 흉년이면 열렸던 곳간... 그곳에 가면 아직도 넓은 고택 구석구석 빛바랜 곳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최부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12대에 걸쳐 ‘만석지기’로 불렸던 가문. 최씨 가문 부의 시조는 정무공 최진립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가해 전공을 세우고 결국 전사, 병조판서에 추증된 나라의 충신이었다. 청백리로 녹선될 만큼 지극히 검소했던 그는 자손 대대로 부의 토대를 닦았다.

시조가 남긴 훌륭한 인품과 가풍을 바탕으로 후손들은 더욱 높은 치적을 쌓는다. 임란 직후 황무지 개간 장려책으로 인해 많은 농토를 확보한 후손들은 당시 집합법이었던 농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이앙법을 도입,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럼에도 결코 부를 과시하거나 남용하지 않았던 후손들은 ‘부자지만 지켜야할 가훈’ 육연(六然)과 육훈(六訓)을 바탕으로 300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이어가는 ‘명부(名富)’를 이뤘다.

그리고, 12대인 마지막 최부자 ‘최준’에 의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절정에 이른다. 일제 강점하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에게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던 그는 광복 후 인재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현재, 영남대학)과 계림학숙을 설립했다. 이로 인해 300년을 이어온 부(富)의 전통은 사라지게 됐지만 오랫동안 후대 사람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과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후손들은 서울로 이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검소함을 기반으로 한 최씨 집안의 육연(六然)과 육훈(六訓)은 다음과 같다. 현대에 와서야 논의되고 있는 많은 경영지침들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눈길을 끈다.



육 연(六然)

-.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세속을 초월하는 경지)하게 지내고
-.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는 온화(누구에게나 평등한 마음가짐)하게 대하며
-.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잡념을 자제) 가지고
-. 유사감연(有事敢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임전무퇴를 의미)하게 대처하며
-. 득의담연(得意淡然) : 성공했을 때는 담담(경거망동을 삼가란 의미)하게 행동하고
-. 실의태연(失儀泰然) : 실의(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교훈을 의미)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육훈(六訓)’이 이야기하는 부의 경영 노하우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 높은 벼슬에 오름으로써 당쟁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하는 한편, 학문 수행에도 소홀하지 않도록 하여 최소한의 사회 지위와 양반신분을 지키도록 하였다. 오늘날 부를 기반으로 권력을 탐하고, 그 권력으로 부를 늘려가는 정경유착을 미연에 방지하고, 학습으로써 새로운 수로체계 등 생산성을 높이는 신기술을 도입하는 혁신 경영을 실천했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 상한으로 정한 만석을 초과할 경우에는 소작료를 낮추었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지역사회로 환원, 더 이상의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생산이 늘면 열심히 일한 소작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가는 Win-Win의 노사 경영, 보다 큰 이익을 올리는 독과점의 지위를 얻기 위한 몸집 부풀리기보다 적정한 규모, 건전한 경쟁에 기반한 상생경영에 힘썼다.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 기근이 들면 가난한 경작농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흰 죽 한 끼의 헐값에 땅을 내놓는 ‘흰죽 논’과 같은 토지를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자신의 부의 증식에 이용하지 않는 윤리경영의 정도를 지켰고, 이를 통해 ‘좋은 기업, 착한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굳혔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는데 그 비용만 연 1천석에 달했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지나는 과객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고 세상의 흐름을 알려주는 메신저였으며, 이들을 통한 새로운 정보습득에 비용을 아끼지 않는 지식정보경영의 비결이 숨겨져 있다.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흉년이 들면 일년 소작수입 가운데 일천석을 사방백리(동:동해안, 서:영천, 남:울산, 북:포항)의 빈민구제에 사용했다. 단순한 이윤추구에서 벗어나 사회공헌을 경영이념으로 삼은 사회적 기업이자, 빌 게이츠가 주장한 창조적 자본주의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 최부잣집 며느리들은 삼베옷을 입어야 했는데, 기우고 또 기워 입어 옷을 삶아 세탁할 때 세 말의 물이 들어가는 솥에 치마 하나만 넣어도 가득 찼다고 한다. 최근 보스턴 컨설팅 그룹이 CEO(최고 경영인)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제시한 근검절약과 솔선수범을 생활화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성장기업의 토대가 됐다.


JTN 현화영기자 / 사진 송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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