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은 누구나 ‘진주만’이라는 지명만 들어도 전쟁에 얽힌 역사적 비극을 떠올린다. 폴란드인들에겐 그런 지명들이 훨씬 더 많다.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독일로부터 수없이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지명이 ‘카틴 숲’이다.

1940년 옛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폴란드인 전쟁포로와 민간인 2만1857명이 처형된 곳이다. 지난 10일 레흐 카친스키(60) 폴란드 대통령과 폴란드 정·군계의 고위인사 등 96명의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카틴 숲 근처의 러시아 서부 도시 스몰렌스크에서 착륙을 시도하다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카친스키 일행은 카틴 숲 학살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슬픔과 충격을 더해준다. 나와 내 형제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카틴 숲 학살의 의미를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으면서 자랐다(필자의 아버지는 1939년 폴란드 육군에서 근무하다가 영국으로 망명해 영국군 휘하의 폴란드 군대에 입대했고 그 후 미국으로 이민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폴란드는 히틀러뿐 아니라 스탈린의 군대로부터도 침략을 받았으며, 그들은 저항의 싹을 잘라내려고 수많은 폴란드군 장교와 민간인을 처형했다”고 말했다.

스탈린 정권과 그 이후 소련과 폴란드 정권들이 카틴 숲 학살을 나치 책임이라고 주장해온 사실은 이 사건의 상징적 의미를 한층 더 증폭시켰다(나치가 러시아를 침공한 시기는 이 사건이 일어난 지 한참 후였다). 난 처음엔 학생 신분으로, 그 다음엔 기자로 공산 시절의 폴란드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폴란드인들 사이에선 ‘카틴’이라는 말이 정부와 정부의 역사 왜곡에 반대한다는 뜻의 암호처럼 쓰였다. 당시엔 서방에서나 카틴 숲 학살의 진실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제2차 세계대전 중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서 일했다)처럼 서방으로 망명한 폴란드인들은 학살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학살 자체만큼이나 나쁜 짓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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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공=뉴스위크 한국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