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순례 길, 동양의 산티아고를 거닐다

‘바보이반의 산 이야기’ ‘좁쌀 한 알’ ‘산에서 살다’로 잘 알려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자연주의 농부작가 최성현이 이른바 ‘도보순례 에세이’를 펴냈다.

일본 사람들도 일생에 한 번은 걷고 싶어 하는 길, 전 세계적으로 연간 15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는 동양의 산티아고 길, 88개의 사찰을 차례로 참배해 하나의 원(圓)을 완성하면 한 가지 소원이 이뤄지는 길, 일본의 시코쿠 길.

삐걱거리는 삶의 균형을 찾아 시코쿠로 간 작가는 이 길을 걸으며 대자연과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고, 느린 걸음으로 찬찬히 삶을 명상하며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인생의 근원적인 물음에 답을 구한다.

그런 작가에게 시코쿠의 대자연과 시코쿠 사람들, 그리고 이국의 수많은 순례자들은 기꺼이 말을 걸어왔고, 그들이 던지는 화두와 가르침은 고스란히 글의 주제가 되었다. 이 책은 홀로 걷는 시간의 소중함, 대자연에 대한 깊은 감사,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순례 전통을 지켜온 시코쿠 사람들의 오셋타이 정신을 환기시키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하도록 만든다.

쉼의 절실함을 채워주는 휴식 같은 순례에세이

최성현 작가는 원래 제행무상을 강조하는 ‘앉은 자리 여행’ 예찬자였다. 그런 그가 10킬로그램을 웃도는 배낭을 메고, 오직 자신의 두 발만으로 1200킬로미터를 걸어야 끝나는 시코쿠 순례를 마친 후 도리어 ‘걷기 여행’을 찬미하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무엇보다 ‘시코쿠의 대자연’이었다.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노인 중에도 지혜로운 이가 있고, 책이라는 게 아예 없던 시절을 산 아메리카나 호주 등지의 원주민들이 하는 말에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그들이 대자연이라는 책을 읽기 때문”이라고 믿어온 작가는 이번 책을 통해 ‘자연을 명상하며 홀로 걷는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가르침을 주는지 깨닫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작은 풀인 이끼의 고마움, 합장의 자세로 세상으로 나오는 모든 씨앗들을 향한 찬양, 산을 가꾸는 바다와 바다를 먹여 살리는 산의 순환 등은 순례 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걷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자연의 놀라운 모습이자 값진 발견이었다.

또한 작가는 시코쿠 순례 길만의 아름다운 풍습인 오셋타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오셋타이란 시코쿠 사람들이 순례자들에게 음료수나 돈, 과일, 과자, 빵, 한 끼의 식사, 하룻밤의 잠자리 등 자신이 줄 수 있는 것들을 무료로 제공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시코쿠 사람들이 천 년을 보존해온 이 정신에는 현대적인 셈법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치유의 힘이 숨어 있는 듯하다. 작가가 만난 많은 순례자들이 시코쿠 순례를 마친 후 몸의 병이 낫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하는데, 대자연과 더불어 걷는 동안 그들이 심신의 안정을 찾게 된 이유도 있겠지만 뜻밖의 오셋타이 덕분에 팍팍한 마음이 정화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56일간 3천 리를 걸으며 작가가 발견하고 감탄하고 깨친 서른네 개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그 이야기들은 마치 시코쿠의 순례 길을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세파에 찌든 우리들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젠 정말 좀 쉬고 싶다’고 느끼지만 쉽게 떠날 마음을 못 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말한다.

“일 년에 최소한 한 달가량은 누구나 여행을 해야 돼. 그리고 그것을 이 나라 헌법으로 정해야 돼. 사람은 쉬어야 착해지는 법이거든.”

권선혜 book@jtn.co.kr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jtn.co.kr

<ⓒ 1+α 문화미디어 JTN NEWS(www.jtn.co.kr) 무단전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