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전 세계인이 즐기는 가장 강력한 기호품이다. 세계적인 금연 확산으로 말미암아 나날이 끽연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커피애호가들은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루 2~3잔 정도 적당히 마시는 커피는 당뇨와 심장병 예방 등 건강에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커피의 매력은, 감성적 정신적인 영역으로 침투해, 마시는 그 순간만큼은 자유와 행복의 극 속으로 도취시킨다는 데에 있다. 물은 마시는 것이지만 커피는 '마신'다기 보다는 '음미'하는 행위다.

커피의 다양한 유혹은 특히 영화에서 잘 나타난다.

자유가 없이 오랫동안 격리된 삶을 살다가 너무도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는 그야말로 생명수 이상의 감동을 준다. 알 파치노와 진 해크만 주연의 영화 '허수아비(Scarecrow)'에도 이런 느낌이 잘 나타나 있다. 커피마니아지만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관계로 커피에 대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치고도 모자랐던 진 해크만. 갓 출소한 그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내뱉는다.

"이 놈의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었어."

커피는 피곤을 가시게 하는 활력소이기도 하다. 존 스터지스 감독의 'OK 목장의 결투'(1957년작)는 서부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피곤에 지친 '와이어트'(버트 랑카스터) 보안관이 집무실에서 잠깐 졸고 있다. 동생이 들어와서 그에게 커피를 가져다준다. 커피를 본 와이어트는 "아, 반갑군. 안 그래도 무척 마시고 싶었는데"라며 커피를 음미한다. 쏟아지는 잠을 날려 버리며 각성시키는 전통적인 커피의 기능을 하는 장면이다. 다시 원기를 회복한 와이어트는 한 바퀴 순찰을 돌겠다며 나가려 하지만 동생인 지미가 대신 돌겠다고 해 결국 와이어트는 집무실에 남게 된다.  

커피는 천천히 음미하는 느림의 미학이다. 2006년작 '갈매기 식당(Kamome shokudo)'은 핀란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일본 여성과 주변 사람들을 다룬 참으로 따뜻한 영화다. 한 남자가 식당 주인인 여주인공에게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라며 접근해 맛있는 커피 만드는 시범을 보인다. 느리지만 한땀 한땀이 깃든 커피 내리기다. "코피루왁(kopi luak), 정말 매혹적인 풍미의 커피죠"라고 말하며. 커피를 만들어 여주인공에게 시음을 권하고, 그녀는 그 풍취에 반해 마시며 놀란다. 커피 맛에 놀란 여주인공에게 남자는 "누군가 당신만을 위해 (정성을 다해) 끓여주면 더욱 진하죠"라고 말한다. 이후 그녀는 그 남자가 알려준 방법대로 커피를 끓여 손님들에게 준다. 얼마 후 이 식당은 커피 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게 되고 거기에 음식 맛까지 뛰어나 나날이 손님이 많아지게 된다. 

커피의 매혹적인 향은 담배를 부르기도 한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커피와 담배'에선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담배와 커피는 너무 잘 어울려요. 정말 오묘한 조화죠."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커피와 담배로만 버무려진 한편의 강력한 '블랙앤스모크'의 유혹이다.

스티브 매퀸 주연의 '영광의 탈출(The Great Escape)'에서도 커피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독일군 포로수용소 간수에게 잡힌 연합군 포로가 커피가 있다며 독일 병사를 꼬시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그 병사는 커피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덕분에 연합군 포로들의 작전은 큰 탄력을 받는다. 군기가 살벌하게 세기로 소문난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마저 커피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그런가 하면 커피는 암시의 기제이기도 하다. 영화 '더티 해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매력이 십분 발휘된 범죄영화로, 특히 그의 매그넘 총이 빛을 발한 범죄수사영화의 고전이다. '더티 해리' 시리즈 중 4편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무장 강도들이 한 식당을 털려고 들어간다. 마침 그때 이스트우드도 커피를 마시러 들어오게 된다. 이 식당의 10년째 단골인 그를 알아본 식당 주인은 강도들로부터의 위협을 이스트우드에게 알리기 위해 색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그가 시킨 커피에 설탕을 가득 넣어서 준 것이다. 평소 블랙만 마시던 이스트우드는 주인이 커피를 너무 이상하게 탄 걸 맛보며 식당 안에 무언가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이상한' 커피가 단서가 돼 그는 강도들을 일망타진하기에 이른다. 식당 여주인의 기지와 형사로서의 이스트우드의 동물적 직감이 잘 발휘돼 멋진 결론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한편 커피는 그리운 추억을 되씹게 한다. 1989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괴팍스럽고 까칠하기 그지없는 부유한 유대계 할머니 '데이지'(제시카 탠디)와 그녀의 흑인 운전기사 '호크'(모건 프리먼)가 점차적으로 인간적 신뢰와 우정이 쌓여가는 과정을 그린 따뜻한 영화. 데이지는 그의 대저택 요리를 전담했던 흑인 하녀 '아델라'가 노환으로 죽자 매우 슬퍼한다. 어느 날 호크가 "아델라가 죽은 이후로 커피 맛도 예전 같지 않군요"라고 말하자 데이지 역시 "비스켓과 닭튀김은 할 수 있겠는데 커피만큼은 아델라같이 안되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죽은 아델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슬퍼한다. 고인이 된 한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나마 달래주는 커피.

커피는 즐거움이고 배꼽 잡는 담소이기도 하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잘 알려진 롭 라이너 감독의 2008년작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것들(The Bucket List)'은 암 선고를 받고 몇 개월밖에 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의 두 노인을 그린 영화다. 그들은 죽기 전까지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을 실행하기 위해 병원을 탈출(?)하는데...'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암 때문에 대수술을 받아 입원하고도 병실에 커피기구인 사이펀을 침대 옆에 둘 정도로 커피 애호가다. 같은 병실 환자인 '카터'(모건 프리먼)는 그가 커피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주자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콜은 자신의 코피루왁을 자랑한다. 하지만 카터는 "걱정마슈, 훔쳐 먹지 않을 테니. 난 그런 커피엔 관심 없소. 인스턴트커피 체질이라"고 말한다.

이후 함께 여행을 떠난 그들, 여행지에서의 대화.

콜: 자네 왜 그리 코피루왁을 싫어하지?
카터: 내 입맛에 그건 너무 진하단 말야.

증상이 더 나빠져 병원에 다시 입원한 카터를 문병온 콜에게 카터는 이렇게 묻는다.

"자네 아직도 그 커피 마시나?"

그리고는 자료 하나를 읽어보라고 건넨다. 내용은 이렇다.

코피루왁은 세계 최고가의 커피로서 진품으로 인정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원산지인 수마트라에는 야생 나무고양이가 살고 있다. 이 고양이가 원두를 먹고 소화시킨 후에 배설을 하면, 마을 사람들이 그 배설물과 함께 원두를 가공한다. 나무고양이의 위액과 원두가 결합해서 코피루왁의 독특한 맛과 향취를 준다.

이걸 읽은 콜은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즐긴 커피가 고양이 배설물?'이라는 생각에 너무도 놀라서 "내게 뻥치는 거지?"라고 카터에게 되묻는다. 둘은 한참동안 웃는다. 그리고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인 '눈물이 날 때까지 웃기'라고 쓴 항목을 지운다.

끝으로 커피는 사랑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밥 딜런의 애절한 명곡 'One More Cup Of Coffee'의 가사는 매우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서 아침을 맞이한 여자. 남자는 곧 자신을 떠날 것 같다. 갈 길은 멀고 떠나보내기 아쉽지만, 한잔의 커피로나마 그의 고단함을 위로하며 애타는 사랑을 전한다는 내용이다. 

여러분에겐 커피가 어떤 의미인가.


조성진 음악평론가 


* 조성진은...
 
고려대 사회학과 졸. '핫뮤직' 편집장, 서울재즈아카데미 학과장, 벅스뮤직 부장 역임. 900여장의 음반해설 및 단행본을 집필했으며, 중앙일보 '조성진의 음치불가'를 비롯한 여러 일간지 칼럼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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