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자화상
배우 윤정희의 연기내공 '여전'

**감독 이창동/제작 파인하우스필름㈜/139min/15세관람가/5월13일**

[JTN뉴스 현화영 기자]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이창동 감독의 신작 ‘시’가 언론과 평단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지난 27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최초로 공개됐다.

이창동 감독은 ‘초록물고기’, ‘오아시스’, ‘밀양’ 등 내놓는 작품마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대한민국 대표 리얼리즘 감독이다. 사회의 중심이 아니라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이나 소외 계층을 주인공으로 한 사회, 한 시대가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시각을 고수해온 외골수기도 하다.

이러한 성향은 이번 작품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니만큼, 이창동 감독은 대학에서 국어교육학을 전공하고 문단에 몸담았던 경험을 살려 ‘시(詩)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영화는 하천에 떠밀려오는 한 여중생의 시신을 보여주며 “시는 죽었다”라는 짧고 강렬한 명제에서 출발한다. 전혀 시적이지는 않은, 역설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프롤로그다.

손자를 홀로 키우며 살아가는 노년의 여성 ‘양미자’(윤정희 분)를 중심으로 그가 생애 처음 시를 쓰려 노력하는 과정과 여중생의 자살사건을 병치시킨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도 생활보호 대상자이자 간병 아르바이트를 하는 병들고 빈곤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미자는 꽃과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 한 번도 써 본 적 없지만 아름다운 시 한편을 쓰는 소박한 꿈을 지니고 살아간다. 하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시란 무엇일까. 극중 김용택 시인의 푸념처럼, 우리는 시를 쓰려고도 읽으려도 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한 마디로 시는 ‘죽었다’. 시는 사람의 감정과 심상을 담는 소통의 수단이자 인간성의 상징이다.

감독은 여중생의 자살(시의 부재)과 시를 쓰고 싶은 미자의 이야기를 통해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문제의식을 관객들에게 내던진다. 눈에 보이는 것에 열광하고 물질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요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가치와 존재의식을 묻고자 한 것.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이끈 윤정희는 15년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와 여전히 녹슬지 않는 연기 내공을 펼쳤다. 실제로도 ‘소녀’같은 그는 극중 미자와 완벽히 겹쳐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창동 감독이 윤정희를 모델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윤정희의 극중 이름 미자는 그의 본명 손미자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윤정희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장면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공들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목소리의 작은 떨림 하나에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여기에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이 더해져 또 하나의 수작이 탄생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들이 저마다 다른 감정과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다면, 감독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은 그런 면에서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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