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은 “눈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번 영화는 눈도 즐거운 영화였어요.

정정훈 촬영감독이 아주 세련된 감각이 있어요. 그동안 사극을 찍을 때는 비주얼에 별로 집착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세 번째 사극을 찍으면서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었어요. 촬영감독의 감각에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했더니 결과가 그대로 나타났어요. 역시 아시아 최고의 촬영감독이야!

-사람들이 감독님에게 갖고 있는 편견이 또 하나 있잖아요.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다.’ 이 편견을 이번에 확 엎어버리신 것 같아요.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감독님이 그만큼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 아닐까요.

난 구박받으면 그걸 인정해. 만약 내가 작가주의 감독이라면 그런 소리 듣지 말아야지. 그런데 난 엄연히 상업 영화 감독이니까 대중의 비난을 받으면 그걸 인정해야 돼. 그리고 또 개선해야지.

-배우들이 유독 이준익 감독님을 따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배우 말을 아주 잘 듣거든.(웃음) 예전에 '라디오스타' 찍을 때 안성기 선배한테 그런 말을 했어. 감독은 놀이터의 경비원이다. 여기 시소도 있고 그네도 있다. 형이 시소를 타든 그네를 타든 맘대로 해라. 단, 놀이터 밖으로 나오면 내가 막을 거다. 그건 틀린 거니까. 이번에도 똑같아. 차승원이나 황정민한테도 놀이터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만 말해줬어. 보통 경비원이 “너 왜 시소 타? 너 그네 타!” 이러진 않잖아.(웃음)

-감독님 영화가 늘 그렇듯 '구르믈~'에도 인상적인 대사가 많습니다. 특히 “구름 속에 가려졌다고 달이 없는 건 아니야” 하는 대사가 기억에 남아요. 저마다의 해석이 다르겠지만 감독님의 해석이 궁금합니다.

모든 작품은 보는 사람의 삶의 경험과 취향에 따라 다르게 읽히니까. 젊은 친구들은 이 영화를 그냥 칼싸움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세파를 겪은 사람이 보면 인생이 보일 거라고. '구르믈'에서는 ‘꿈’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견자는 아버지 부재 콤플렉스가 있어서 꿈이 없거든. 견자에게 달이 꿈이라면 구름은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결핍과 열등의식이야. 황정학은 죽으면서 “몽학이는 떨어지는 해를 쫓아가네. 그럼 몽학이가 구름이냐 달이냐” 한다고. 이때 구름은 헛된 욕망이고 달은 진정한 의로움 정도겠지.

-한 번의 관람으로 모든 것을 다 낚아채기는 어려운 대사들이에요.(웃음)

내 영화가 유독 반복 관람이 많잖아. 특히 '왕의 남자'는 몇 십 번씩 본 사람도 많아. 최소한 세 번 이상은 봐야 각 캐릭터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온전하게 스캐닝되는 거지. '구르믈'은 더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는 영화예요. 레이어가 다층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그걸 다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를 총체적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감독님의 캐릭터들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공평하게 정성껏 만들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워낙 인간에 대해 애정과 관심이 많으셔서 그런 것 같아요.

감독 개인의 생각에 다른 사람들을 끼워 맞추는 것은 작가주의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나 같은 상업 영화 감독은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해서 최대한 돋보이게 하는 쪽으로 연출을 해야 하고. 축구감독이 선수들 못한다고 갑자기 그라운드로 뛰어나가 공을 차면 안 되잖아.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잘 조율해서 더 빛나게 해줘야지. 배우도 모든 걸 미련 없이 극에 쏟아야 아쉬움이 적고.

-'구르믈'의 경쟁작이 '아이언맨2'예요!

힘들어 죽겠어. 피해갔으면 좋겠지만 개봉 스케줄이 그렇게 됐어.(웃음) 그래도 작품 색깔이 달라서 시너지를 낼 수도 있지.

-'구르믈'을 통해 감독님의 변화를 봤기 때문에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됩니다.

'황산벌'부터 내가 만든 작품을 보니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딱 하나 있더라고. ‘영화 속의 인물이 관객보다 더 아파야 한다.’ 이게 내 지론인 거 같아. 현실에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극장에 와서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을 봐야 위안이 되는 거지, 나보다 더 성공한 사람을 보고 나오면 관객은 왜소해져. 나보다 더 고독하고 상처받은 인물을 볼 때 그 페이소스를 통해서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는 것 같아. 난 어느새 고통으로 꽉 찬 인물들로만 영화를 찍고 있다고. 뭐, 다음 작품도 마찬가지겠지. 인간에 대한 연민이 내가 영화를 찍는 첫 번째 요소이기 때문에.

-지금 준비하시는 작품이 '황산벌'의 후편이죠?

맞아요. 제목이 '평양성'인데, '황산벌'이 백제가 망한 이야기라면 이 영화는 고구려가 망한 이야기야.

-차승원 씨가 조만간 멜로에 출연하고 싶다며 감독님이 '평양성' 말고 멜로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렇지 않아도 그런 말을 했어. 난 그냥 멜로 말고 에로 멜로로 찍고 싶은데, 차승원이 몸이 되잖아. “센 에로 멜로 하는 거 어떠냐”고 하니까 “좋다”고 하더라고. 써놓은 시나리오도 있었어. 너무 퇴폐적이라고 투자사한테 ‘빠꾸’ 먹었지.

-저도 '평양성'보다 그 에로 멜로가 더 궁금한데요?

투자가 돼야 찍지. 진짜 죽이는 에로 멜로인데 투자를 안해주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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