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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 [리뷰]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JTN뉴스 임귀연 객원기자] 지금은 불멸의 명작이 된 ‘안네의 일기’는 열세 살 소녀였던 안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은신처에서 가족들과 숨어 살았던 2년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일기장에 적어 내려간 필사적인 삶의 기록이었다. 작년에 대만에서 출간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도 죽음을 앞두고 살기 위해 써내려 간 필사적인 기록이라는 면에서 이와 닮아 있다.


문학을 사랑하고 장래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사랑스런 소녀 ‘팡쓰치’가 열세 살 때부터 수년에 걸쳐 이웃에 살고 있는 유명 문학 강사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하고 급기야 미쳐버리고 마는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대만에서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작품을 쓴 여성 작가도 대만 문단계의 반짝이는 샛별로 불릴 정도로 이 작품은 대만에서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어느 영화 주간지에서 이 책을 소개하고 있는 그 다음의 짧은 한 줄이 그래서 더욱 더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쓴 린이한은 책이 출간된 후 자살했다. 작가 나이 26살이었다."


그녀의 자살 이후 이 책이 그녀의 자전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고통의 기록임이 밝혀졌고, 그녀의 1주기에 때맞춰 국내에도 발간됐다. 책의 뒤에 실린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실제 얘기했다고 한다.


“세상 그 어떤 ‘팡쓰치’든 소비되어버릴까 봐 두려워요. 그녀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엽기적이고 선정적인 소설로 보여지는 건 원치 않아요. 매일 여덟 시간씩 글을 썼어요. 쓰는 동안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언제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죠. 다 쓰고 난 뒤에 보니 가장 무서운 건 내가 쓴, 이 가장 무서운 일이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것 뿐이에요.

 

이 책을 펼치기 직전에도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평범한 일상을 지켜내며 사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불편한 진실’이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에 나오는 어떤 구절처럼 한 방울 두 방울 눈물로 쓰여진 듯한 이 모든 생생한 고통의 흔적들을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아픔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단숨에 읽어가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그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역설적이다.


13살 소녀 ‘쓰치’는 쌍둥이 같은 단짝 친구 ‘이팅’과 아름답고 똑똑하고 기품 있기까지 한 동경의 대상 ‘이원’ 언니와 늘 함께였다. 어느 날,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을 함께 보며 이원은 쓰치와 이팅에게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방관해선 안돼. 알았지?”


그러나 이처럼 아름답고 성숙하며 사랑받을 자격이 넘치는 여성들은 곧 그들이 좋아하고 선망했으며 그들 곁에 가까이 있었던, 위선적이고 죄책감 없는 남성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짓밟히고 만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들 자신의 의지로는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같은 고통 속에서 허우적댄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리궈화’와 ‘첸이웨이’라는 문제적 인물을 통해 돈과 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이웃에 있을 법한 평범한 중년 남성이 어떻게 죄책감 없이 악마로 변할 수 있는지 세밀하게 표현한다.


어떻게 반복적으로 여성을 강간하거나 폭행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뻔뻔하고 위선적이되 정신적인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건지 이 소설은 놀랍도록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성폭행 가해자를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 피해자를 죄책감으로 입 다물게 하는 소설 속 사회의 무능함은 2018년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이 소설의 빛나는 점은 작가 본인이 실제 겪었던 개인적 상처를 어렵사리 마주하면서도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듯 정제된 언어로써 담담하게 독자들에게 이를 풀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그 예리하고 깊이 있는 통찰력과 놀랍도록 성숙한 감수성이 층층이 녹아 있는 아름다운 표현들이 영혼을 울리는 감동을 선사한다. 


섬세하고 빨려들 듯 흡인력 있는 문장들이 눈 앞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생생한 순간들이 되어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때때로 가해자들의 충격적인 야만과 위선에 반사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오랜 시간의 성찰과 빛나는 감수성으로 숙성 시킨 한 줄, 한 줄의 문장들은 마치 방금 막 툭 튀어나왔음에도 허공을 맴돌고 있는, 어느 연극의 명대사처럼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다.


늘 결국에는 해피엔딩으로 얼렁뚱땅 끝맺고는 하는 영화와 달리 이 소설은 늘 좋게 끝맺는 법이 결코 없는 현실과 유사하다. 2017년 4월27일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작가 린이한의 죽음 이후 가해자로 지목된 강사는 자신의 범죄를 부인하고, 그가 두 달 남짓 그녀와 교제했으며 아내가 그 사실을 알고도 용서해주었다고 주장했다. 들끊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 해 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를 기점으로 여론에도 변화가 일었다. 그녀가 소설을 쓴 의도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녀가 정말로 피해자였는지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했다. 그녀의 죽음 1주기를 맞은 올해 4월 중순, 대만의 최대 인터넷 게시판에는 ‘린이한은 그저 불륜녀다. 글솜씨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  ‘검찰이 조사해보니 두 사람은 불륜 관계였다. 그런데도 사회의 칼날이 가해자로 지목된 남자를 반쯤 죽여 놓았다.’ 등의 게시글도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녀는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한 듯 작품 속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상상력도 없었다.’ 라고 썼다. 애초의 의도와 다르게 그녀가 필사적으로 이 책을 쓴 모든 수고와 그 고통스러운 고백이 그녀 자신 뿐만 아니라 아무도 구하지 못한 채 결말을 맺는 걸까.


설혹 좌절된 미완의 꿈일지라도 이 소설에서 작가가 ‘이원’의 입을 빌려 ‘이팅’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은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팅, 쌍둥이 중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걸 영원히 잊어선 안돼. (중략)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미덕이야. 이팅, 분노를 표출하는 책을 써. 생각해봐. 네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운인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이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는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라고 썼다. ‘린이한’ 작가는 고통의 삶을 마감했지만, 역설적으로 작가의 영혼이 깃든 이 책은 아주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래도록 누군가에게 너 혼자가 결코 아니라는 위안과 동시에 분노를 표출할 용기를 줄 것이다. 한편, 타인의 고통에 그동안 둔감하고 무심했던 누군가에게는 성폭행을 겪은 여성들의 아픔을 진정 껴안으며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폭넓은 시각과 감수성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에도 수많은 성폭행 논란들이 현재 진행중이다. 이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그저 논란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무감각하게 소비되고 있는지, 왜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가해자가 아닌 이 책을 읽는 정직한 독자들의 몫인지도 진정 따져 묻고 싶다.  


우리 이웃에 숨어 있는 평범한 악을 경계하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을 방관한 채 또 한 명의 잠재적인 ‘리궈화’와 ‘첸이웨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에게도 이 책은 특별하고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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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기자 press@jtn.co.kr
  • 기사입력 : 2018-06-03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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