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너 엄정행 교수 [사진=JTN]

[인터뷰] 원로 테너 엄정행 교수 개탄...뇌출혈 극복후 또다시 '한국 가곡 살리기' 앞장

“오~ 내 사랑 목련화야~”란 노랫말만 들어도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테너이자 한국 가곡을 세계에 알려온 엄정행(66) 교수.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젊은 성악가들 못지않은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를 보면서 나이와 열정은 별개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지난 2007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부터는 더욱 왕성한 활동으로 '위기는 곧 기회'라는 경구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09 엘리트모델 선발대회-1부’에서는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 조성규)와 협연해 녹슬지 않은 열정으로 많은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엄 교수는 지난해 2월 정년을 맞아 경희대 음대 성악과 교수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현재 명예교수와 연주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그는 “무대에 서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작년부터는 ‘엄정행 독창회’를 통해 음악인생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요즘 한국 가곡계는 거의 전멸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악가들이 관중 앞에서 우리 가곡을 알릴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고 있고 이제 음악적 다양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돼 버렸다. 이에 그는 "우리 가곡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하루빨리 시작해야 할 때"라고 역설한다.

21일 오전 서울 회기동 경희대에서 테너 엄 교수를 만나 그의 음악 인생과 한국 가곡의 현주소에 대해 들어봤다.

- 지난 2007년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고 해서 너무 놀랐습니다. 요즘 상태는 어떠신지요.

▲ 경희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주 17시간 강의와 6~10회 가량의 연주스케줄로 제 몸을 돌볼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쓰러질 당시도 지방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직후였지요. 그냥 ‘머리가 좀 아프다’, ‘감기에 걸렸나 보다’하고 말았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어요. 검사 결과 뇌출혈이었죠. 의사 선생님은 잘못하면 언어장애에 신체장애가 올 수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하지만 곧 컨디션을 회복했고, 입원한지 2주만에 퇴원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워낙 체력이 좋기도 했지만 밀려있는 연주스케줄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월 검진을 받는 것을 빼고는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 아프고 난 후 달라진 점이 있으시다면.

▲ 아찔한 경험을 겪고 나니 아직 음악을 할 수 있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하게 됐습니다. 지난 32년간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성악가는 그저 무대에서 노래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요즘은 아프기 전보다 목소리도 더 좋아지고 힘이 생겨 안정적인 연주활동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인 거죠. 예전에는 늘 피로가 쌓여 공연도중 쉰 목소리가 나오는 등 불만족스러울 때가 많았는데 요즘은 건강이 좋아져 공연할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 지난해 2월 데뷔 40주년을 맞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지난해 정년퇴직과 동시에 데뷔 40주년을 맞았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다음해였으니까 지난 2008년이 제 음악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라 할 수 있겠네요. 데뷔이래 지금까지 190여회의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국내 성악가들중 가장 많은 횟수라 할 수 있죠. 40주년 기념이란 타이틀의 독창회만 올해 9번을 했으니까요. 내년 9월4일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200회 기념 독창회도 열 계획입니다. 벌써 40주년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군요.

- 요즘 클래식 공연을 접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 화가에게 그림판이 있어야 하듯 음악가에게는 무대가 있어야 합니다. 무대에 서고 나면 늘 아쉽고 불만족스럽지만 그래도 평생 무대를 사랑해왔죠. 그런데 요즘은 클래식이나 가곡계가 영 맥을 못 추는 형상입니다. 음악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균형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막상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죠.

- 한국 가곡계의 문제점을 짚어 주신다면요.

▲ 이제는 한국 가곡계가 거의 무너졌다고 해도 될 만큼 문제가 심각합니다. 성악가들이 설 무대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고작해야 시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나 지역 문화행사들이 전부죠. ‘가곡의 밤’과 같은 행사는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음악이 한낮 스트레스 해소용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자극적이고 빠른 템포의 댄스가요에만 관심을 갖다 보니 순수음악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죠. 어떤 음악이든 자꾸 들어야 친숙해지고 좋게 느껴지는 데 그런 기회 자체가 차단돼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신문이나 방송, 많은 언론매체에서 우리 가곡을 알리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주셨으면 합니다.

- 교수님은 비(非) 유학파로도 유명하신데요. 클래식 음악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 우리의 노래, 가곡에는 한(恨)이 서려있습니다. 힘든 세월을 겪어온 우리 민족만의 설움과 아픔이 노래에 고스란히 배어있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언어에는 외국인들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특유의 발음이나 억양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성악가들은 우리 가곡을 연구할 생각은 안 하고 너도나도 유럽으로 유학가기에 바쁩니다. 외국에서 교육을 받고 온 성악가들에게는 한국 가곡의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의 언어에 이미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이죠. 이제 우리의 가곡, 우리의 노래를 연구하고 계승할 수 있는 성악가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정확한 가사전달을 위해 우리 언어를 연구하는 일도 하루빨리 선행돼야 할 것입니다.

- 앞으로의 연주활동이나 계획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얼마 전까지 40주년 기념 독창회를 뉴질랜드, 뉴욕 등 해외에서 개최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독창회도 계획됐었지만 신종 인플루엔자 문제로 잠정 연기됐죠. 작년에는 ‘엄정행 가곡집’이란 이름의 1집 앨범도 냈는데, 올해 말에는 2집도 발매할 예정입니다. 힘이 닿는 한 많은 연주회와 앨범활동을 통해 우리 가곡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JTN 현화영 기자 / 사진 이충근, 유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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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 '2009 엘리트모델 선발대회' 당시 엄정행 교수의 공연 장면 [사진=J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