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저 | 창비

어떤 추억에 대하여(『마징가 계보학』,2005)

1. 넓은 마당

과연 상처는 전이된다. 상처는 나만의 몫은 아닌 것이다. 권혁웅 시인의 시집 『마징가 계보학』의 시들이, 독자의 공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집은 하나의 사슬처럼 묶여있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장소-예컨대 달을 세며 한없이 오르면 후미진 골목이 나오고 그 옆엔 작은 이발소가 있고 대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주인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돌아서면 지하 한 켠에 자신만의 소굴이 나오는, 누추한 일상의 어떤 공간 말이다-가 뇌리에 그려진다. 아니, 박힌다는 표현이 맞을까. 시집은 ‘공간’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곳에는 가족이 있다. 소굴 안의 가족, 허나 소굴은 너무 많아 안팎의 구별이 없는 것을. 이 순간도 다른 순간의 기억이 되듯이, 소굴은 언제까지나 소굴인 것을.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마징가 계보학」), 하교 길에 마주친 바보는 내 팔뚝만한 고추를 빙빙 돌리며 담벼락에 오줌을 누곤 했다, 주인집 작은누나는… 면도칼을 씹다가 주먹에 맞아 입 안이 통째로 날아갔다(「광기의 역사」), 작은형은 공장에 나갔는데 프레쓰기가 손가락 둘을 먹어버렸다 늘 왼손으로만 악수하던 사람(「요괴인간」), 누나 손은 미싱을 돌리기에는 너무 우아했다 누나는 술잔을 집었다(「독수리 오형제」), 그녀의 이름은 역발산기개세 … 30킬로그램 화장품 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그 여자, 씩씩하게 걸어서 오네 … 양손에 쌀 백근을 나누어 들고 내 깔깔한 혓바닥에 벼이삭 심으러 오네(「떨어져나가 앉은 산 위에서」)

화자는 그의 눈을 통해 본 것을 여과 없이 독자에게 보여준다. 다만 이쯤에서 그것은 이미 가족만의 상처는 아니며, 몸에 뿌리내린 버릇처럼 고통스럽고 버리고 싶지만 살아가는 동안은 안고 가야 할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소중한 그 무엇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상처를 까발림으로써 또 독자들에게 전이시킴으로써 그 아픔의 기억을 덜어보려는 셈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의 말처럼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아닌 것인가.

낙원이발관에서 삶을 시작한 아톰은 수상기(手相記)로 점철된 유년기를 보낸 후 지금은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는 현재 삶의 공간이자 실질적 생활 장소이다. 장소 안에 화자가 산다. 화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포함된다. 화자가 어느 공간에 있든 ‘공간’이 갖는 의미,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연성에 불과할 뿐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다. ‘공간’속에 놓여있는 화자,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그 순간, 피부딱지가 쏟아져 내려 생긴 먼지의 기억으로 그 의미가 온전히 재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파트’는 ‘넓은 마당’과 차이를 두지 않는다. ‘넓은 마당’은 화자의 삶 속에서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생겨나는 사람들, 그들의 ‘장소’와 통하는 것이다.

넓은 마당은 방광과 같아서 터질 듯 못 견딜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짐을 이고지고 한꺼번에 그곳을 떠나곤 했던 것이네                                -「방광에 고인 그리움」

상처 딱지가 아물기도 전에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고 싶어 성급히 떼어버린 기억이 있다. 어서 빨리 떠나버리고 싶었던 상처 딱지는, 훈장처럼 남은 흉터는, 전생(前生)의 무의식성이 못내 그립다.

2. 밀실과 죽음, 반복의 역사, 그리고…

그러나 어찌하여 또 밀실인가. 넓은 마당으로 대변되던 그의 기억은 그것과 밀실 사이에서 혼동하는 화자를 통해 다시금 비쳐진다. 넓은 마당이 삶을 대변하는 총체적 공간이라면 밀실 또한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모는 일 년 만에 친정에 돌아와 제 방에 … 등의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이모는 장편만 보고 도 세상을 알았다(「광기의 역사」), 먼저 승천한 사람은 용구 아빠였다 … 얼어붙은 몸을 소주병 곁에 두고 사라졌다(「드래곤」), 넓은 마당 한구석에 관 짜는 집이 있었다 … 나는 아파트에 산다 그분들처럼 이 동네 사람들도 밤이 되면 층층이, 나란히, 눕는다(「드라큘라」), 재수가 없던 아버지 십여 년 후 심해로 잠수해서는 다시는 올라오지 않던 - 지금도 재수를 떼는 어머니를 보면 그 시절이 여전하다는 걸 알 것 같다(「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어머니는 열넷에 염병에 걸려 머리가 하얗게 세셨다 … 나는 스물하나에 수두를 앓았다 … 지금도 내 오른쪽 볼에는 조그만 통풍구가 있다(「신파조」)

밀실과 죽음. 그것은 그것의 뉘앙스만큼 연계된 것일까. 그(시인 또는 화자)의 시선은, 그 애매함은 차라리 담담함으로 퇴색된다. 담담한 그의 일상은 그. 아니, 이제 우리의 살갗으로 스며든다. 반복, 반복… 새로운 것은 여전히 새롭고 여전히 어렵게 찾아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반복, 반복… 하고 있다.

1 건넌방에 세들어 살던 한씨 아저씨는 폐암 치료를 받느라 머리털이 한 움큼씩 뽑혀나갔다 듬성듬성한 머리가 벌초한 처삼촌 묘 같았다 머리가 황토 봉분이 되기까지 아저씨는 아편을 맞으며 여섯 달을 더 버텼다

2 나주 아줌마는 20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자궁암으로 아기집을 들어냈다 요람이 무덤으로 변했다 그마저 도굴 당했으므로 아줌마는 가출한 아들의 동가식서가숙을 수습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서 을지로까지 아들은 깨진 도자기처럼 뒹굴었다

3 용구 엄마는 지아비와 막내를 제 가슴에 묻고는 가끔씩 주먹으로 앙가슴을 치곤했다  부자(父子)가 답답하다고 끙끙댔기 때문이었을 게다 허리가 굽어가면서 그녀의 봉분도 서서히 깎여, 평토장한 무덤이 되어 갔다

 4 지금도 떠나간 그녀가 눈에 밟힌다 다시 내 이름 부르면 죽을 줄 알아! 내 눈을 밟고 돌아선 그녀에게도 교대로 흔들리던 무덤이 두 기나 있었다 지금도 거기 누워 하염없이 떠가는 칠성판처럼…… 한세월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덤의 역사」전문

3. 진정성

그의 시편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질펀하다. 흔히 ‘문화’로 분류되는 대중의 코드들-만화, 영화, 음악-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마징가부터 시작하여 미키마우스, 요괴인간, 투명인간, 스파이더맨, 독수리 오형제, 슈퍼맨으로 통칭되는 각종 맨들, 원더우먼과 악당들, 애마부인, 가위손… 등 가릴 것이 없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겐 공감이 찾아갔거나(혹은 그러지 않거나) 그 밖의 사람들에겐 앞선 시대의 추억들-추억이라 불러 마땅할지 모를-을 짐작하여 더듬어 보는 계기가 되었을 터이다. 그는 해답을 내리지 않았다. 무릇 문학이란 대답이 아닌 질문을 하는 것이니 그것으로 해답이 될까. 감상과 흥미가 있고 작가가 보여준 시대의 시간이라든지 장소라든지 무엇인가 조금씩 새어 나와 무엇인가 조금씩 전달되었다면 해답이 될까.

어떤 추억은 추함에서 아름다움으로 건너왔고, 또 어떤 추억은 아름다웠지만 이미 퇴색해버렸고, 또 어떤 추억은 아팠으나 끝끝내 아픔이고, 또 어떤 추억은 오늘을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시인은 어떤 추억을 품고 있었을까. 아름답고 추하고 빛바랜 아픔일 그의 시편들은 분명코 그의 기억 속에 잠식하고 있다 태어났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잠식하고 있다가 숨이 막힐 때면 다시금 더듬더듬 기어 나와 웃고 눈물짓고 악수할 것임을 짐작해 볼 뿐이다. 그리고 그 짐작이 내일을 이어주는 끈임을 감히 확신해 보는 것이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쩔걱거리며 그가 왔다 중절모를 쓴 남자, 빼빼 마른 남자, 새카맣게 탄 남자, 한손에 가위를 다른 한손에 대패를 든 남자, 씰루엣은 무서웠으나 사실은 달콤한 남자였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녹았다 그는 가위로 우리를 잘랐고 대패로 우리를 밀었으며 부러진 나무젓가락으로 우리를 돌돌 감았다 우리는 그에게서 연애와 합격과 실연을 배웠다

우리는 욕을 할 때마다 그를 들먹거렸으나, 그는 우리에게 겨우 고장난 라디오나 양은냄비 따위를 요구했을 뿐이다 가끔 그에게 엉뚱하게 생니를 내미는 벗도 있었으나,

그건 그 벗이, 가혹한 사랑의 대가로 앓던 이 대신에 제출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확히 일곱 시까지 있다가 돌아갔다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는 집에 돌아가기엔 너무 이르고 새로운 일을 벌이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는 우리의 낮과 밤을, 첫사랑과 이별을, 그렇게 이어 붙였던 셈이다

                                                                                - 「가위손」전문

JTN 권선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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